판옥선 승무원 구성에 관한 검토


신재호 Defence Korea 전쟁이론분야 자문위원 

 

1. 서설

 

 

2. 전선(판옥선) 및 귀선(거북선)의 승무원 구성에 대한 각종 자료

수군변통절목의 각군선제정액 (비변사등록 숙종 2년 10월24일조 및 각영리정청등록 수군변통절목조)

 

 (선장)

 선직

무상

타공

요수

정수

좌우포도장

  사부

 화포장

  포수

  노군

  계

통영상선

 

  2

  2

  2

  2

  2

      2

   22

  14

   26

  120

 194

(수사) 전선

 

  2

  2

  2

  2

  2

      2

   20

  12

   24

  110

 178

전선

 

  2

  2

  2

  2

  2

      2 

   18

  10

   24

  100

 164

통영귀선

 

  2

  2

  2

  2

  2

      2

   14

   8 

   24

  100

 158

귀선

 

  2

  2

  2

  2

  2

      2

   14

   8

   24

    90

 148

 

수군변통절목(水軍變通節目, 개정된 수군 관련 행정명령이란 의미임)에 규정된 승무원 구성표는 김재근 교수가 1976년에 처음으로 이를 주목한 이래 조선 시대 판옥선 승무원 구성을 연구하는 모든 사람들이 인용하는 유명한 자료이다. 이 자료가 임진왜란 당시의 승무원 구성표를 그대로 보여주는 것은 아니지만, 타 자료에 비해 가장 구체적인 수치를 제공해주는 것은 사실이다. 조선 후기의 각종 자료상에 나타나는 승무원 편성은 이 수군변통절목에 규정된 승무원 편성방식의 기본 틀을 벗어나지는 않는다.

 

수조홀기 (18세기 초~ 1754년 사이에 발행된 것으로 추정)

 

  선장  

 선직

무상

타공

요수

정수

(좌우포도장)

 사부

 (화포장)

  포수

 능노군

 계

영제일좌선

 

 

 

 

 

 

기패관 겸   도훈도 2

  18

별파진1 + 교사 4

   24

  111

  ? 

영제삼전선

    1

 

 

 

 

 

기패관 겸   도훈도 2

  18

별파진 1 + 교사 4

   24

  120

  ?

영제사귀선

    1

 

 

 

 

 

기패관 겸   도훈도 2

  18

별파진 1 + 교사 4

   24

  120

  ?

각 전선

 

 

 

 

 

 

기패관 2,   도훈도 1

  18

                교사 5

   24

  120

  ?

 

이 자료상에는 선직,무상,타공,요수,정수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다. 타공, 요수, 정수 등은 배 운행에 직접적으로 관련된 직책이므로, 이들이 배에 탑승하지 않았다고 생각할수는 없고, 기록상의 단순 누락으로 생각된다.

수조홀기에 따르면 당시 경상좌수영에 소속된 전선과 귀선이 총 21척고, 영제일좌선,영제삼전선,영제사귀선 3척을 제외한 나머지 18척은 동일한 승무원 구성을 가지고 있다. 우후가 탑승하는 영제이전선은 특이하게도 일반 각 전선과 동일한 승무원 구성을 가지고 있다.

수조홀기 상의 승무원 구성표가 가지는 또다른 특징은 화포장이 없고, 대신 교사(아마도 화포교사)가 탑승하고 있다는 점이다. 또한, 좌우포도장이 없고 대신 기패관과 도훈도가 탑승하고 있다. 영제일좌선, 영제삼전선, 영제사귀선에는 기패관 겸 도훈도(旗牌官 겸 都訓導) 2인이 탑승하며, 기타 각 전선에는 기패관 2인과 도훈도 1인이 탑승한다.

기패관은 각 전선마다 2명식 탑승하므로 경상좌수영 전체 정원이 36명(일반 각 전선 18척x2)이며, 영제일/영제삼/영제사선에 탑승하는 기패관 겸 도훈도는 총 정원이 6명(3척x2)이다. 도훈도의 경우는 각 전선마다 1명식 탑승하므로 전체 정원이 18명이 되어야 정상이나, 어쩐 일인지 총 정원이 15명으로 되어 있어 정원에서 3명이 모자란다.

이 경상좌수영의 승무원 구성표에는 화포장이 없고 화포교사가 존재한다는 점 등 다른 자료와의 차이점이 몇가지 존재한다. 이러한 차이는 반드시 시대적인 차이인것 같지는 않고, 각 수영별로 승무원 구성과 편제에 독자적인 특색이 있었던 것 같다.

영제일좌선(경상좌수영 기함)에는 병선감관(兵船監官) 1인과 지구관 6인, 포수초관(砲手哨官) 1인이 추가로 탑승하고 있는데, 경상우수영 전체 정원에 병선감관이 1인, 지구관이 6인, 포수초관 1인으로 된 것으로 보아, 병선감관과 지구관, 포수초관은 수사가 타는 기함(영제일좌선)에만 탑승한 것 같다. 지구관의 경우 조선 후기 각 군영에서 하급 실무를 담당하는 군인내지 문관으로 다른 기록에서도 쉽게 확인할 수 있는 직책이다. 그러나, 병선감관과 포수초관은 다른 자료에선 잘 확인되지 않는 직책이다. 정확한 역할은 알 수 없으나 명칭상으로 본다면 병선감관은 함대 전체에서 배에 관련된 사무를 총괄하는 군인으로 볼 수 있고, 포수초관은 함대의 화약무기를 담당하는 군인으로 볼 수 있다.

 

전라우수영지 (1787년 발행 추정)

 

선장

 선직

무상

타공

요수

정수

좌우포도장

사부

화포수

 포수

 능노군

 계

전선(본영)

 

                 10

            22

   12

  26

  110

 180

전선

 

                 10

            20

   10

  24

  100

 164

귀선(본영)

 1

                 10

            16

   10

  24

    90

 151

귀선

 1

                 10

            20

   10

  24

  100

 165

 

전라우수영지의 원본은 일제시대 구 일본 해군성에서 강탈해 갔다. 해방 이후 김재근 교수가 그 복사본을 1부 국내로 입수해 온 것이 전부이며, 현재 국내에서는 열람이 거의 불가능하다. 다만, 김재근 교수가 그의 저서에서 인용한 부분을 정리하면 위와 같다. (김재근, 『조선왕조군선연구 』, 일조각, 1977년, p180)

이 전라우수영지에 나타나는 승무원 구성표는 기본적으로 숙종대의 수군변통절목에 규정된 승무원 구성표와 거의 유사하다. 선직, 무상, 타공, 요수, 정수의 구체적인 내역은 나와 있지 않으나 다른 자료와 비교해보면 각 2명식일 것이라고 쉽게 추정할 수 있다. 좌우포도장과 사부의 경우에도 구체적인 내역을 구별하지 않고 있는데, 이 역시 각 2명식이 좌우포도장이고 나머지가 사부(射夫)일 것이다. 화포수와 포수, 능로군의 숫자는 타 자료와 크게 차이가 나는 것은 아니다.

 

만기요람

 

 (선장)

 선직

무상

타수

요수

정수

좌우포도장

사수

 화포수

포수

능노군

직할함선

전라좌수영 직할

    7

   4 

  8

 24

  8

  8

지구관 2, 기패관 60, 포도관 8, 훈도 9

 105

  40

 146

  673

전선 4, 병선 5

전라우수영 직할

    7

   8

  9

 21

  8

  8

포고관 2, 지구관 6, 기패관 25, 포도관 8, 훈도 6

 116

  42

 140

  546

전선 2, 귀선 2, 방선 1, 병선 3, 해골선 1

경상좌수영 직할

   8

선고직    6

  

타공  25

  8

  8

선감관 2, 군기감관 1, 지구관 6, 기패관 70, 도훈도 5

 사부  132 

 교사 20

 156 

  575

전선 3, 귀선 1, 병선 5, 탐선 1

분방법

 

 

  1

   사공  1

 

     사수 + 포수 = 40명

   80

 

 

만기요람 주사편 분방법조를 보면 간단하게 수군 승무원 편성예를 제시하고 있으나, 개별 함정별 구체적인 승무원 편성방식은 나오지 않는다. 결국 전체 함대 규모에서 개별 승무원 구성을 역추적할 수 밖에 없다. 경상우수영의 경우 삼도수군통제영을 겸하므로, 인원 구성이 상당히 복잡하다. 어쩔 수 없이 경상우수영을 제외한 전라좌수영, 전라우수영, 경상좌수영을 대상으로 전체 명단을 정리해 보았다.

우선 선장(船將)의 경우 함선 총수에서 각 2명식 정원이 모자란다. (사후선 등 소형함선은 제외했다) 예들들어 전라좌수영 직할 함선은 총 9척이고, 선장은 7명이다. 전라우수영 직할 함선은 역시 총 9척이고, 선장은 7명이다. 경상좌수영 직할 함선은 총 10척이고 선장은 8명이다. 누락된 각 2명식의 선장은 누구일까? 당연히 각 수영의 수사와 수군 우후일 것이다. (4. 선장임명체제 참조)

선직(船直)의 경우 함선 숫자와 적당하게 조합하기가 상당히 어렵다. 전라좌수영의 경우 전선 4척에 각 1명식의 선직이 임명되었다고도 생각할 수 있으나, 전라우수영의 경우 그렇게 대입하기도 어렵고, 전선/귀선에 각 2명식의 선직이 탑승했던 것 같다. 경상좌수영이 경우 아예 선직이란 직책이 없으며 대신 선고직(船庫直: 배창고지기)이란 직책이 존재할 뿐이다. 위 도표상에는 빠져있으나 경상우수영의 경우에도 아예 선직이란 직책이 없다.

위 자료에서 타수(타공) 숫자가 요수와 정수 숫자에 비해 두드러지게 많다. 타수가 요수와 정수에 비해 숫자가 많은 것은, 타수의 경우 전선이나 귀선이 아닌 방선,병선,해골선에도 탑승하기 때문일 것이다. 수군변통절목에는 각 함정에 타수 2명, 요수 2명, 정수 2명식 규정되어 있다. 따라서, 적어도 전선(판옥선)급에서는 타수 2명, 요수 2명, 정수 2명이 표준으로 생각된다. 즉, 위 자료상의 전라좌수영 요수 8명과 정수 8명은 전라좌수영 직할 전선 4척에 탑승하는 인원일 것이고, 전라우수영 요수 8명과 정수 8명도 전라우수영 직할 전선 2척과 귀선 2척에 탑승하는 인원일 것이다.

사수와 화포장, 포수, 능로군의 경우 대입하기가 다소 복잡하기는 하나, 전체적인 비율면에서 타 자료와 큰 차이는 없음을 알 수 있다. 다만 이 자료에서도 경상좌수영의 경우 화포수(화포장) 대신 교사가 탑승하고 그 숫자도 전라좌수영이나 우수영의 1/2에 불과하다. 이러한 경상좌수영의 특징은 수조홀기에 타나나는 특징과 동일한 것이다.

위 자료의 분방법은 만기요람 주사편 분방조에 나오는 내용으로 좌우 각 10개의 노를 가진 전선(판옥선)을 기준으로 최소 승선인원을 규정한 것이다. 이 규정에 따르면 전선은 노가 모두 20촉인데, 각 노에 4명식, 전체 노군이 80명이라고 소개하고 있다. 여기에 사공 1명, 무상 1명, 사부와 포수가 합쳐서 40명이라고 소개하고 있다. 이 규정은 각 승무원 구성의 최하한을 보여주는 예라고 생각된다.

 

호좌수영지 (1847년 발행)

 

선장

 선직

무상

타공

요수

정수

좌우포도장

 사부

화포장

 포군

 능노군

영자제일호 판옥전선

   

   1

  사공 8

포도관2, 기패관2, 훈도1

 15

   10

  24

 144

 207

숙자제일호 판옥전선

 

   1

  사공 8

포도관2, 기패관2, 훈도1

 15

   10

  24

 120

 183

숙자제육호 전선

   1

   1

  사공 8

포도관2, 기패관2, 훈도1

 15

   10

  24

 108

 172

숙자제이호 귀선

   1

   1

  사공 8

포도관2, 기패관2, 훈도1

 15

   10

  24

   96

 155

 

호좌수영지의 경우 선직이 2명이 아닌 1명으로 축소되어 있다. 만기요람에도 선직의 규모가 축소된 것으로 보아 1800년대 이후에는 선직이 2명이 아닌 1명인 경우가 일반적인 것 같고, 경상좌수영이나 경상우수영의 경우 아예 선직이 탑승하지 않은 경우도 있었던 것 같다.

이 자료상에는 무상, 타공, 요수, 정수는 나오지 않고 사공(沙工)만 8명이 나온다. 다른 자료와 비교해 보면, 이들 사공이 결국 무상,타공,요수,정수를 모두 합쳐서 부르는 명칭임을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최두환씨는 사공의 의미에 대해 '배가 수심이 얕은 곳에 얹히거나 노를 저을 수 없을 때, 상앗대로써 바다 밑을 밀어서 배를 가도록 하는 사람'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최두환,『충무공 이순신 전집』 제6권, p117) 사공의 원래 의미가 그럴 수도 있겠지만, 호좌수영지의 사공은 무상,타공,요수,정수의 총칭임이 명백하다.

기타 사부, 화포장, 포군, 능로군의 비율은 다른 자료와 거의 유사하다.

 

3. 각 함선의 선장 임명 체제

- 해당 지역 수군 지휘관이 기본적으로 선장 역할 수행
- 지역별로 1척 이상 추가로 존재하는 함선에는 별도의 선장(船將) 임명
- 문신 지방관이 관할하는 지역에 소속된 함선에는 별도의 대장(代將) 임명
- 전선(판옥선), 귀선(거북선), 방선, 병선에는 선장이 임명되나, 사후선 등 소형 함정에는 선장 없음

경상좌우영의 수군훈련절차를 기록한 수조홀기(水操笏記, 수군해상훈련 절차를 담은 책으로 1751년 이전 작성된 것으로 추정, 상한선은 대략 18세기 초)를 살펴보면 각 전선, 거북선, 방선, 병선에 별도의 선장 직제가 규정된 경우와, 선장에 대한 언급이 없는 경우가 있다.

경상좌수영의 기함인 영제1좌선(營第一座船)에는 별도의 선장(船將) 직제가 규정되어 있지 않다. 이는 경상좌수사가 직접 영제1좌선의 선장 역할을 수행하기 때문에 별도의 선장 직제를 규정하지 않은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영제2전선(營第二戰船)의 경우에도 우후소기(虞侯所騎)라고 소개해 놓았는데, 이는 경상좌수영 직할 제2호 전선은 경상좌수영 우후가 운용한다는 뜻이며, 나아가 우후가 선장 역할을 수행함을 짐작하게하는 내용이다. 대신, 영제3전선(경상 좌수영 제3호 전선), 영제4귀선(경상 좌우영 제4호 거북선)의 경우에는 각 선장일인((船將一人)이라고 표기되어 있다. 경상좌수영의 지휘관급 인물은 경상좌수사와 우후 뿐이므로, 이들이 우선 2척을 운용하고, 나머지 2척은 별도의 선장(船將)을 임명해서 운용했음을 알 수 있다.

부산제1전선의 경우에는 첨사소기라고 적혀있는데 반해 부산제2전선은 선장일인(船將一人)이라고 표기되어 있다. 즉, 부산진 소속 전선 2척 중에 1척은 부산진첨사가 직접 운용하고, 나머지 1척은 별도의 선장이 운용한다는 의미이다.

결국 조선시대의 각종 군용함선의 경우 해당 지역 수군 지휘관이 기본적으로 선장(船將) 역할을 겸임하고, 지역별로 추가로 1척 이상 존재하는 함선들의 경우 별도로 선장(船將)을 임명했음을 알 수 있다.

기장현과 울산부의 경우에는 대장(代將)이라고 표기해 놓았는데, 기장과 울산은 무신이 아닌 문신 지방관이 임명된 지역이므로, 별도의 대리 지휘관 (代將)이 임명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임진왜란 당시의 실제 사례를 보면 지휘관 유고시에도 대장(代將)이 임명된 경우를 볼 수 있다.

조선시대의 함정에는 전선 보다 작은 방선, 병선, 사후선 같은 함선들도 존재한다. 수조홀기를 보면 병선에도 모두 별도의 선장(船將)이 임명되었음을 알 수 있다. 당시 경상좌수영에서는 방선을 보유하지 않아 방선에 대한 규정은 없으나, 방선은 병선보다 큰 배이므로 방선에도 당연히 선장이 존재했을 것이다. 수조홀기에는 사후선에 대한 선장 규정은 없으므로, 선장은 사후선 같은 소형 함선에는 임명되지 않고, 병선급 이상의 함선에만 선장이 임명되었음을 알 수 있다.

 

 함명 (전선과 귀선 외의 함선은 제외)

 운용책임자 규정

영제1좌선 (營第一座船, 경상 좌수영 기함)

 

영제2전선 (營第二戰船, 경상 좌수영 직할 제2호 판옥선)

 좌수영 우후 소기 (所騎)

영제3전선 (營第三戰船, 경상 좌수영 직할 제3호 판옥선)

 선장(船將) 1인

영제4귀선 (營第四龜船, 경장 좌수영 직할 제4호 거북선)

 선장(船將) 1인

부산제1전선 (釜山第一戰船, 부산진 제1호 판옥선)

 부산진 첨사 소기

부산제2귀선 (釜山第二龜船, 부산진 제2호 거북선)

 선장(船將) 1인

다대제1전선 (多大第一戰船, 다대포 제1호 판옥선)

 다대포 첨사 소기

다대제2귀선 (多大第二龜船, 다대포 제2호 거북선)

 선장(船將) 1인

서생전선      (西生戰船, 서생포 판옥선)

 서생포 첨사 소기

감포전선      (이하 생략)

 감포 만호    소기

축산전선

 축산포 만호 소기

칠포전선

 칠포 만호    소기

포이전선

 포이 만호 소기

개운포전선

 개운포 만호 소기

두모전선

 두모포 만호 소기

서평전선

 서평포 만호 소기

기장현전선

 대장(代將) 1인

울산부전선

 대장(代將) 1인

 

이러한 추정은 조선 순조 때에 쓰여진 만기요람(萬機要覽)을 통해서도 다시 확인할 수 있다.

만기요람 주사(舟師)편 전라좌수영조에 따르면 전라좌수영 직할의 전선은 4척이고 병선은 5척인데, 선장(船將)은 7인이다. 이 경우 2척은 전라좌수사와 전라좌수영 우후가 선장 역할을 수행한다고 생각하면 선장의 인원수(9척=선장 7인 + 수사 + 우후)가 일치한다.

만기요람 주사편 전라우수영조에 따르면 전라우수영 직할의 전선은 2척, 거북선 2척, 방선 1척, 병선 3척, 해골선이 1척이다. 각종 함선의 수가 총 9척인데 반하여,  선장(船將)의 수는 7인 뿐이다. 역시 전라우수사와 전라우수영 우후가 선장 역할을 수행한다고 가정해야 선장의 인원수가 일치한다.

이외에도 편찬연대 미상의 호좌영사례(湖左營事例, 전라좌수영 업무편람)에서도 본영1전선(本營一戰船)과 본영2전선 승무원 명단에는 선장(船將)이 없는데 반하여, 본영3전선과 본영4귀선에는 선장(船將) 각 1인이 규정된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선장(船將)에는 누가 임명되었을까?

각 관할구역을 가지는 수군 지휘관들이 선장을 겸임한다는 사실은 위에서 확인을 했다. 그렇다면 이들 외에 수군 지휘관이 아니면서 추가로 존재하는 함선의 선장(船將)에 임명되는 사람들은 도대체 누구일까?

수군에서 선장(船將)의 직책은 매우 핵심적인 보직이므로, 이 직책에 임명되는 것은 최소한 양반급 이상으로 생각된다. 각 함선의 탑승자 중에 군관(軍官)이 자주 보이므로 선장(船將)은 최소한 이들 군관급 보다는 고위급으로 생각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경국대전은 물론이고, 조선후기에 편찬된 속대전, 대전통편, 대전회통 등 조선왕조의 공식법전에는 군관(軍官)에 대한 규정은 있어도 선장(船將)에 대한 규정은 존재하지 않는다.

결국 선장에 누가 임명되는지는 간접적으로 추정해 볼 수 밖에 없다. 조선시대의 군관(軍官)은 조선 왕조의 군대를 지탱하는 핵심적인 구성원이다. 조선왕조의 군대는 그 정연한 편제에도 불구하고 실제 각급 중소부대의 지휘관계 규정이 아주 엉성하다. 또한, 현대 군대의 위관급이나 하사관으로 분류할 수 있는 직책들에 대한 규정도 전반적으로 애매한 편이다. 그러한 약점을 다소나마 보완하는 것이 바로 군관(軍官)이다. 경국대전에 따르면 군관은 절도사급(수사,병사)의 주진(主鎭)에는 5명, 국경 지역의 주요 거진(巨鎭)에는 3명, 기타 제진(諸鎭)에는 2명이 배속된다. 이외에 수영,병영의 부지휘관인 우후(虞侯)에게도 2명의 군관이 배속된다. 여기에 추가하여 지휘관이 개인적으로 임명하여 데리고 다닐 수 있는 군관들도 있다. 이러한 군관들은 현대 군대의 부관 역할부터, 지휘관의 경호, 참모, 고위급 전령, 소부대 지휘관 역할까지 여러가지 기능을 수행한다.

특이하게도 이러한 군관이라는 직책 자체에 규정된 품계가 존재하지 않는다. 이는 두가지로 해석할 수 있는데, 첫째로 군관 자체가 무신 직책 중에 거의 말단급에 해당하여 품계가 없었다고 해석할 수 있고, 둘째로는 군관에 임명되는 사람들이 여러가지 품계를 가질 수 있어, 일률적인 규정을 하지 않았을 가능성도 있다. 조선조의 모든 관직은 품계와 직형 사이에 어느 정도의 융통성을 가지는게 보통이나, 군관의 경우는 특히 더 그랬던 것 같다. 실제 사례를 보아도 둘째의 가능성이 더 크다. 경국대전의 법적 규정상으로 군관은 무과급제자 혹은 별시위나 갑사 출신 중에서 임명되었는데, 실제 임진왜란 당시의 군관 사례를 보면 前 훈련원 봉사(종8품) 나대용 처럼 정식으로 서반 품계를 받은 자도 있고, 前 만호(종 4품) 윤사공이나 前 권관(종9품) 고안책 처럼 수군 지휘관을 역임한 자들도 있다. 심지어 영조대의 속대전(續大典) 군관조를 보면 절도사(병사,수사)를 지낸 사람을 관찰사의 군관으로 임명하는 것을 금지하는 규정도 찾아볼 수 있다. 굳이 법으로 이런 규정을 만들 것을 보면 前職 수사나 병사를 지낸 인물 중에서 군관(軍官)에 임명된 사례가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별시위나 갑사들은 양반과 양인의 경계선 상에 있는 신분이며, 前職 수사나 병사 출신이라면 종3품급 이상에 해당한다. 군관들의 신분은 이처럼 편차가 아주 심했던 것이다.

실제 군관들이 이렇게 다양한 신분층의 사람들 중에서 임명되었다면, 이들 군관 중에 개별 함선의 선장(船將)에 임명될만한 적격자가 존재했을 것임을 쉽게 짐작할 수 있다. 그러한, 추정을 뒷받침하는 자료를 이순신의 장계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이순신의 '견내량파왜병장'을 보면 전라좌수영 군관인 前 만호 윤사공이 좌별도장(左別都將)에 임명되었을 알 수 있고, 前 만호 송응민이 우별도장에 임명되었을 알 수 있다. 이들의 전공을 보면 다른 수군 지휘관급들의 전공과 나란히 나열되고 있어, 윤사공과 송응민이 판옥선급의 선장(船將) 이었을 가능성이 상당히 높다고 할 수 있다. 특히, '부산포파왜병장'에 등장하는 귀선돌격장 이언양은 이순신의 군관이므로, 거북선급의 선장(船將)에 군관이 임명되었음을 보여주는 직접적인 기록이라고 할 수 있다.

 

- 선장(船將)과 구별되는 선장(船長)이란 직책은 존재하지 않는다.

해군 충무공수련원 연구실장 최두환 대령이 쓴 『충무공 이순신 전집』을 보면 선장(船將)과 별도로 선장(船長)이란 직책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선장(船將)이란 배를 지휘하는 지휘관이고 1척 이상의 배를 지휘하며, 선장(船長)이란 배를 부리는 사람으로 말그대로 선장이라는 것이다. (최두환,『충무공 이순신 전집』 제6권, p116) 그러면서도 그렇게 구별할 수 있는 사료적 근거는 제시하지 않고 있다.

같은 책을 보면 김재근 교수도 거북선에 선장(船長) 1명이 존재했다고 주장한 것처럼 인용한 도표가 있다. (최두환,『충무공 이순신 전집』 제6권, p115) 그러나, 최두환씨가 인용한 김재근 교수의 『거북선,정우사,1992』p98을 보면 선장(船長)이란 직책은 나오지 않는다. 김재근 교수는 몇차례 판옥선과 거북선의 승무원 구성표를 설명하면서 선장(船將)이란 직책을 제시한 적은 있으나, 선장(船長)이란 직책에 대해 언급한 적은 없다. 더구나 김재근 교수는 숙종대의 '수군변통절목'이나 '전라우수영지'를 인용해서 조선 후기 함선의 승무원 구성표를 제시한 적은 있으나, 그 자신이 어떤 별도의 승무원 구성표를 제시한 적은 없다. 최두환씨의 이런 식의 무책임한 인용은 학문적 기본을 망각한 태도이다. 최두환씨의 저서를 보면 이런 인용에 있어 실수를 여러차례 반복하고 있다.

필자가 지금까지 조선시대 수군관련 각종 사료의 원문을 직접 검토해 본 결과에 따르면 수조홀기, 호좌영사례, 만기요람, 풍천유향 전라우수영지 등 거의 모든 자료에서 선장(船將)만 나올뿐, 선장(船長)이란 직책은 나오지 않는다. 또한, 조선왕조실록에도 수군에 선장(船長)이란 직책이 존재했다는 기록은 단 한차례도 나오지 않는다. 다만 필자가 아직 원문을 직접 보지 못한 자료 중에 『호좌수영지(湖左水營誌), 1847년』가 있다. 그러나, 인용부분을 검토해보면 호좌수영지의 선장도 선장(船將)임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호좌수영지에 따르면 전라좌수영의 숙자 제1호 판옥전선에는 선장이 없고, 숙자 제2호 귀선에는 선장 1인이 존재한다. 일부 함선에는 선장이 있고, 일부 함선에는 선장 규정이 존재하지 않으므로, 결국 선장이 존재하지 않는 배는 해당 지역 수군 지휘관이 선장을 겸임함을 알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의 선장이라면 결국 호좌수영지의 선장도 결국 선장(船將)임을 알 수 있다.

 

4. 항해 요원의 구성

- 항해요원은 타공, 요수, 정수, 무상으로 구성

위에서 설명했듯이 수군변통절목의 타공,요수,정수,무상을 호좌수영지에서는 모두 합쳐 사공(沙工)으로 표현하고 있는 것 같다. 결국 타공, 요수, 정수, 무상이 배의 항해와 직접적 관련이 있는 요원들임을 알 수 있다.

이중 타공(일명 타수), 요수, 정수의 경우는 한자에서 그 의미를 유추할 수 있으므로 그 임무를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또한, 수군에 복무한 하급 군인 출신인 송규빈이 지은 『풍천유향 風泉遺響 (1778년 완성된 것으로 추정)』의 주사정구편을 보면 타공, 요수, 정수의 임무에 대해 설명한 내용이 나오므로 그들의 임무와 역할은 명확하게 파악할 수 있다.

일반적으로 임진왜란 당시를 포함해서 조선시대의 전선급(판옥선) 함선의 항해요원은 타공 2, 요수 2, 정수 2, 무상 2명으로 구성되었던 것으로 생각되며, 부득이한 경우 요수,정수,무상의 인원을 줄이는 경우도 있었던 것 같다.

이순신의 장계에서 파악가능한 항해관련 직책은 사공과 무상 뿐이다. 이 {사공 + 무상}은 조선 후기의 {타수 + 요수 + 정수 + 무상}에 해당할 것이다. 타공이나 요수,정수는 통상의 경우 생략 가능한 직책이 아니기 때문이다.

 

타공 (舵工, 키 舵)

풍천유향에 따르면 '타공은 키의 조절을 전담하며, 타문(舵門) 아래에서 적이 공격해 오는 것을 방어한다.' 고 설명하고 있으며 또한 군령상 '타공이 전투중에 키를 비스듬하게 놓아 대포수가 정조준하여 적선에 발사하게 하지 못할 경우 타공을 참형에 처한다' 고 설명하고 있다.

요수 (요手, 감길 요) 

 풍천유향에 따르면 '요수는 돛대의 줄을 전담한다.' 고 한다. 또한, 군령상 '요수가 적을 보고 돛대를 내리거나, 바람을 농간함으로써 적선이 도피하도록 놓아주었을 경우 참형에 처한다'고 설명하고 있다.

정수 (碇手, 닻 정, 石이 아닌 나무 木변을 쓰기도 한다.)

 풍천유향에 따르면 '정수는 닻을 들고 놓는 것을 전담한다.'고 한다. 또한, 군령상 '적선이 이르렀을 때에 정수가 신속하게 닻을 사용하지 않아 일을 그르쳤을 경우에는 사형에 처한다'고 설명하고 있다.

 무상이란 무엇인가? -조선 후기의 무상과 두수

       무상에 대해서는 오랜 기간에 걸쳐 학자들간에 의견 대립이 존재하고 있다. 최초로 이충무공전서와 임진장초, 난중일기를 번역한 이은상씨는 그의 각종 번역본에서 무상(無上, 舞上)을 '물긷는 군사'로 설명했다. 물긷는 일이 별도로 직책을 규정할만큼 중요한 일이라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이에 반해 김재근 교수는 이미 1976년에 판옥선 승무원 구성표를 제시했음에도 불구하고, 오랜기간 무상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직접적인 설명을 피했다. 그후 90년대들어『거북선』에서 처음으로 무상을 '돛대를 조작하는 요원'으로 설명했다. (김재근, 『거북선』, 정우사, 1992  p98) 이후 이러한 설명을 『한국의 배』에서도 반복하고 있다. (김재근, 『한국의 배』서울대 출판부, 1994  p229) 그러나, 이미 최두환씨가 비판한대로 그렇다면 무상과 요수는 어떻게 다른지 설명이 있어야 할 것이다.

해군 대령 최두환씨는 무상에 대해 '배의 안 밑바닥에 찬 물을 퍼내는 사람'으로 설명하고 있다. (최두환, 『충무공 이순신 전집』제6권, p117)  그러나, 최두환씨는 자신의 설을 직접적으로 뒷받침할 직접적인 증거는 제시하지 않고 있다. 다만 최두환씨는 나무로 된 배는 물이 스며들게 마련이므로 배안의 밑바닥에 찬 물을 퍼내야하는게 당연하다고만 주장하고 있다.  

       무상에 대해 무상(無上) 혹은 무상(舞上)이라는 두가지 한자를 혼용하는 것으로 보아, 이 용어가 한자어가 아니라 이두의 일종임을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그 이상 용어 자체에서 추가적인 의미를 확인할 방법은 현재로선 없다. 결국 위 세 연구가들처럼 간접적으로 유추해 볼 수 밖에 없다.

위에서도 설명했듯이 호좌수영지에서는 타공,요수,정수,무상을 합쳐서 사공이라고 표현하고 있는 것 같다. 결국 무상도 사공의 일종이며 타공, 요수, 정수와 마찬가지로 배의 운항과 관련된 직책의 하나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무상은 타공,요수,정수 만큼 중요한 직책은 아니다. 만기요람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같은 순조 시대에 전라좌수영과 전라우수영의 함선에는 무상이 존재했으나 경상좌수영의 함선에는 무상이란 직책이 존재하지 않는다. 즉, 조선 후기를 기준으로 할 경우 있을 수도 있고, 없어도 무방한 것이 무상인 것이다.

그 점에서 주목되는 것이 풍천유향에 등장하는 두수(斗手)라는 직책이다. 풍천유향의 저자인 송규빈은 황해도 수영에서 실제 복무한 군인이다. 그 점에서 그의 수군에 관한 지식은 어느 정도 근거를 가지고 있는 내용으로 생각된다. 송규빈은 '두수는 적을 발견하면 망두를 올리며, 자리를 떠나지 않고 관측한다. 또한 이두표로써 적의 배를 내려 찍는다'라고 소개하고 있다. 또한, 군령상 '두수가 적을 맞아 두려워하고 위축되어 갑판에 올라가지 않거나 또는 법식대로 적을 향해 칼날을 던지지 않을 경우 사형에 처한다'고 설명하고 있다. 망두는 돛대 위에 설치한 관측소이며, 두(斗)는 갑판을 의미한다. 즉, 두수는 관측 및 경계(요즘 해군의 견시)의 역할을 수행하며, 또한 갑판요원으로써의 임무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송규빈의 풍천유향은 '이렇다'는 사실을 설명한 책이 아니고 기본적으로 '이렇게 해야 한다'는 주장을 담은 책이다. 따라서, 실제로 조선시대의 함정에 '두수(斗手)'가 반드시 탑승하고 있었다는 보장은 없으며, 어쩌면 송규빈이 수군 함선에는 반드시 두수라는 직책을 두어야 한다고 주장한 내용일 수도 있다. 그러나, 한가지 흥미로운 점은 송규빈의 저서에 무상이란 직책이 등장하지 않는 다는 점이다. 송규빈은 실제 수군에 근무한 하급 군인이었다는 점에서, 그의 책에서 무상에 대해 전적으로 침묵하고 있는 것은 다소 부자연스러운 일이다.

     필자는 오랫동안 이 문제로 고민해 왔는데, 이 글을 쓰면서 필자는 결국 조선 후기의 무상은 곧 두수이고, 두수가 곧 무상일 것이라는 추정을 하게 되었다. 송규빈이 쓴 풍천유향의 주사정구편에는 각종 승무원 직책이 모두 등장하는데 무상은 빠져있다. 반대로 풍천유향에 등장하는 두수란 직책은 다른 어느 책에도 보이지 않고 있다. 무상이 곧 두수라면 이들이 항해요원 즉 사공의 일부로 간주된 것도 잘 설명할 수 있다. 관측수라면 단순히 적의 동향 뿐만 아니라 배 운항에 필요한 지형지물도 관측할 것이다. 예를들어 배의 진행방향에 암초가 있다는 사실을 타공에 알려주거나 혹은 항해 위치를 파악하는데 필요한 지형을 눈으로 관찰해서 확인해 줄수도 있을 것이다. 이런 임무를 가지고 있는 두수라면 항해요원의 일부로 충분하게 간주할 수 있다. 나아가 결정적으로 송규빈은 통영상선(삼도수군통제사의 기함)에는 망두가 없다고 했다. 망두가 없다면 당연히 망두를 관할하는 두수도 없었을 것이다. 위에서 이미 설명했듯이 만기요람을 기준으로 삼을 경우 무상의 경우에도 전라좌수영,전라우수영에만 존재하고 경상좌수영에는 무상이 없었다. 즉, 무상과 두수는 둘다 항해요원으로 간주할 수 있는 직책이며,  전 수영의 함선에 모두 존재한 직책이 아니라 일부 수영 소속 함선에만 존재한 직책이었다. 결국 결론적으로 현재 필자는 조선 후기의 경우 무상 = 두수라고 추정하고 있다.

임진왜란 당시의 무상

이미 이순신의 각종 기록에서 무상(無上),무상(舞上),무산(無山) 등의 명칭이 보이므로, 이미 임진왜란 당시에 무상이 존재했음은 분명하다. 이 무상의 정체는 무엇일까? 일단 필자는 조선 후기의 무상과 마찬가지로 두수(갑판수 겸 견시)였을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한다.

다만, 앞에서 잠깐 언급했듯이 임진왜란 당시의 기록에는 사공과 무상만 등장할뿐 타공(타수), 요수, 정수 등의 기록은 등장하지 않는다. 즉 임진왜란 당시의 {사공 + 무상}이 조선 후기의 {타수 + 요수 + 정수 + 무상}에 해당한다. 이때 일단 임진왜란 당시의 사공 = 타수 + 요수 + 정수라고 가정해 볼 수 있다.

그러나, 그렇게 보기에는 이순신 장계에 등장하는 전사상자 명단에서 사공에 비해 무상이 너무 자주 등장하고 있다. 정확하게 계산해 보지는 않았으나, 적어도 장계상으로는 사공1:무상2 이상이다. 이 점에 대해서는 두가지로 해석할 수 있다. 첫째, 무상이 갑판에 노출되어 있고, 망두 위에서 관측과 경계임무를 맡은 자이므로 빈번하게 부상을 입었다고 해석할 수도 있겠다. 아니면, 둘째로, 임진왜란 당시의 사공(沙工)은 조선 후기의 타공(舵工, 타수)에 해당하고, 임진왜란 당시의 무상은 조선 후기의 무상 + 요수 + 정수였을 것으로 해석할 수도 있다. 다시말해 원래 임진왜란 당시의 무상은 갑판 위의 일을 담당하는 선원(두수)을 의미하는 용어였지만, 점차 조선 후기에 들어와 무상(갑판수 겸 견시) + 요수 (돛 담당) + 정수(닻 담당)로 분화되었을지도 모르겠다. 물론, 이러한 추정의 직접적인 문헌적 근거는 없으며, 막연한 가정에 불과하다.

한편, 아직까지 정식으로 공개되지 않고 있는, 『귀선중기(龜船重記)』라는 책에 대한 한 보도기사에 따르면, 임진왜란 당시의 거북선에는 선두무상(船頭舞上)이란 직책이 존재했다고 한다. 여기서 선두무상(船頭舞上)은 무상 중에 우두머리를 의미한다고 해석할 수도 있고, 혹은 선두무상이 말그대로 배 앞부분에 위치한 무상을 의미할지도 모르겠다. 후자의 의미로 해석할 경우 당연히 선미무상(船尾舞上)도 존재했을 것이다.

 

5. 전투요원의 구성

-전투요원은 사부, 화포수, 포수로 구성된다.

조선시대 함선의 전투요원은 크게 사부, 화포수, 포수로 구성된다.

 

사부 (射夫) -일명 사군, 사수

'풍천유향'에서는 '사부는 활쏘는 것을 전담하여, 아울러 요도를 휴대한다.'고 설명하고 있다. 이순신의 각종 장계에서도 사부란 표현이 등장하는 것을 여러 차례 확인할 수 있다.

위의 여러 자료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통제사 기함이나 수사 기함을 제외한 통상적인 조선 후기 전선(판옥선)의 경우 사부의 정원은 18명이 표준이었던 것 같다. 물론, 시대에 따라 약간의 편차는 있으며, 특히 호좌수영지에 규정된 사부는 15명으로 다른 자료보다는 다소 적다.

만기요람의 경우 경상좌수영과 경상우수영에는 사부(射夫)로 표현하고 있으나, 전라좌수영과 전라우수영에서는 사수(射手)로 표현하고 있다. 따라서, 사부가 아닌 사수라는 명칭도 사용했음을 알 수 있다.

이들 사부는 어떤 사람들로 구성되었을까? 우선 호좌영사례(편찬연대 미상)의 규정을 보면 사부 105명(名)으로 표현하고 있다. 현대 한국어에서는 사람 숫자를 헤아릴때 모두 몇~명이라고 표현한다. 하지만, 조선시대에는 양반은 원(員)으로, 중인은 인(人)으로, 일반 양인은 명(名)으로, 천민이나 노비는 구(口)로 숫자를 헤아렸다. 사부 105명(名)으로 계산한 것은 결국 사부가 상민이나 양인 계층에서 충원되었음을 의미한다.

임진왜란 당시 이순신의 승전보고문인 '당포파왜병장'의 전사상자 목록을 보면 신분상 양인인 수군(水軍)이나 정병(正兵) 출신 사부(射夫) 이외에 개인 노비나 관청의 노비 출신 사부도 3~4차례 등장한다. 이로보아 사부에 천민인 노비도 상당수 포함되었음을 알 수 있다. (수군이 천민 취급을 당하긴 했으나 신분 자체는 일반 양인이다) 일반적으로 동서양을 막론하고 노를 사용하는 갤리선의 경우 전투요원의 신분이 노를 젓는 요원들보다 신분이 높은 것이 일반적이다. 임진왜란 당시의 상황을 일반화할 수는 없겠지만, 조선 수군의 경우 전반적으로 사부의 신분이나 노를 젓는 요원들 간에 신분 차이는 그렇게 없었던 것 같다. 결국 사부와 노를 젓는 요원을 나눌때는 신분보다는 전투력 유무가 그 기준이 되었던 것 같다.

 

화포장 (火砲匠) - 일명 방포장, 화포수, 대포교사, (화포)교사

수군변통절목에는 각 전선(판옥선)별로 10~14명의 화포장(火砲匠)과 24~26명의 포수(砲手)가 탑승하는 것으로 나와있다. 일단 그 명칭에서 포수가 직접 각종 화약무기 발사를 담당한 사람으로 추정할 수 있고, 화포장은 기술지원을 맡은 사람이거나 혹은 복수의 화포 발사를 지휘하는 사람으로 생각할 수 있다. 자료에 따라 화포장은 화포수로 표기하기도 한다.

임진왜란 당시의 이순신 장계에서는 방포장(放砲匠)과 방포(放砲)를 확인할 수 있는데, ('당포파왜병장'의 전사상자 목록을 보면 방포 우성복, 방포장 허원종이 나옴), 조선 후기의 화포장과 포수를 임진왜란 당시에는 방포장과 방포라고 불렀음을 알 수 있다.

한편, 특이하게도 일부 자료에서는 화포장(화포수)가 등장하지 않고 대신 화포교사나 대포교사가 등장하는 자료가 있다. 이들 화포장(일명 화포수)과 화포교사(일명 대포교사)는 기본적으로 같은 의미지만, 화포운용 시스템이 다소 달랐을지도 모르겠다. 화포장 - 포수 시스템에서는 양자의 인적비율이 대체로 1:2.4 정도이다. 이에 반해  화포교사 - 포수 시스템에서는 양자의 인적비율이 1: 4.8에 달한다.  즉, 화포장이 1명이 포수는 2.4명과 한팀을 구성하는데 반하여 화포교사 1명은 포수 4.8명과 한팀을 구성한다.

만기요람을 보면 같은 순조대의 규정임에도 불구하고, 경상좌수영에서는 (화포) 교사 20명이 등장하는데 대신 화포장(화포수)는 없다. 전라좌수영에서는 화포교사가 1명 뿐인데 반하여 화포수(화포장의 별칭) 40명이 등장한다. 위에서 언급한 수조홀기에 따르면 경상좌수영의 화포교사는 각 전선(판옥선)별로 5명이 탑승하게 되어 있다. 반대로 어떤 자료에서도 전라좌수영 소속 함선에 화포교사가 탑승한다는 자료는 없으며, 대신 화포장(화포수)가 10명이 탑승할 뿐이다.

이러한 차이가 발생한 정확한 원인은 알수 없으나, 일단 조선 수군의 화약무기 운용체계를 화포교사(대포교사)-포수 시스템과 화포장(화포수)-포수 시스템이라는 두가지 제도로 나누어 볼 수 있을 것 같다. 필자의 추정으로는 이러한 시스템의 차이에 대해 세가지 해석이 가능하다. 첫째는 화포장-포수 시스템이 원래 조선군의 화기운용 스타일이고, 화포교사-포수 시스템은 척계광류의 병법에 영향을 받은 명나라식 화기운용 스타일이었을 가능성이다. 둘째는, 화포교사 - 포수 시스템이 보다 이른 시기의 화기운용 스타일이고, 점차 발사속도를 중시하면서 화포장- 포수 시스템이 출현했을 가능성도 있다. 세째는, 이 화포장-포수 / 화포교사-화포수는 사실상 같은 제도이고, 수조홀기 상의 화포교사 수가 적은 것은, 경상 좌수영의 단순한 관행 때문일지도 모른다.

양자의 실전적 차이는 크게 없으나, 화포교사- 포수 시스템에서의 화포교사는 기술지원 못지않게 지휘관적인 성격이 강했던데 반하여, 화포장-포수 시스템에서의 화포장은 말그대로 기술지원적인 성격이 강했던 것 같다.

우선 화포장(火砲匠)은 일명 화포수(火砲手, 호좌수영지의 표기법)로도 불렀으므로, 포수(砲手)와 상하관계에 있지 않았음을 그 명칭에서도 알 수 있다. 이에 반해 화포교사(火砲敎師)는 그 명칭에서부터 최소한 아전급 이상의 지휘관 분위기를 강하게 풍긴다. 나아가 풍천유향에 보면 '대포교사는 대포수를 통솔하고 대포의 발사와 훈련을 전담하여, 아울러 요도와 질려를 휴대한다'고 규정되어 있다. 즉, 대포교사(즉 화포교사)가 대포수(즉 포수)를 지휘함을 명백하게 보여주는 것이다. 또한, 풍천유향은 '화포교사(풍천유향은 대포교사와 화포교사란 용어를 혼용하고 있다)가 평시에 어느 포는 얼마쯤의 흙으로써 높이를 조절하며, 어느 포는 몇 치의 나무로써 간격을 만들며, 한번에 화약은 몇 근 몇 냥을 쓰는지, 납덩이는 큰 돌의 무게는 몇 근 몇냥짜리를 써야하는지, 작은 납덩이는 몇개를 넣으며, 나무화살은 길이가 어떤 것을 써야 하는지, 반드시 기억하고 익혀서 위급한 상황에 응용하도록 해야 한다' 고 설명하고 있다.

포수의 입장에서 보면, 화포장-포수 시스템에서는 장전은 화포장이 해주고 포수는 발사만 하면 되지만, 화포교사-포수 시스템에서는 장전까지도 포수가 직접해야된다는 점이 다르다. 화포교사-포수 시스템이 인원을 조금 줄일 수 있다는 점이 장점이지만 비슷한 전력을 유지하기 위해선 결국 화포교사-포수 시스템에서는 포수가 화약무기를 다루는데 보다 능숙해야할 것이다.

(아직까지 정식으로 공개되지 않은, 『귀선중기(龜船重記)』라는 책에 대한 신문보도 내용을 보면, 이 책에 화포교사라는 직책이 등장한다고 한다. 만약, 지금까지 알려진대로 이 귀선중기가 임진왜란 당시의 책이 맞다면 이미 임진왜란 당시에 화포교사란 직책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이순신의 각종 기록에 방포장(放砲匠)-방포(放砲)가 등장하는데 반하여, 화포교사란 표현은 한번도 등장하지 않고 있다. 따라서, 임진왜란 당시에 이미 화포교사란 직책이 존재했다 할지라도, 이 화포교사는 수조홀기에 보이는 경상좌수영의 화포교사처럼 배 1척에 5명식 탑승하는 요원은 아니었을 것이며, 방포장(放砲匠)의 상급자에 해당하는 직책- 이를테면 수조홀기에 보이는 경상좌수영의 포수초관(砲手哨官)과 유사한 직책이었을 것이다)

 

포수 (砲手) - 일명 포군, 방포 (세분하면 대포수, 조총수, 신기수)

포수는 말그대로 직접 각종 화약무기를 발사하는 자이다. 이순신 장계를 참조해보면 임진왜란 당시에는 방포(放砲)라고 불렀던 것으로 추정된다. 조선 후기의 일부자료에서는 포군(砲軍)이란 용어를 사용하기도 한다.

화포장(화포수)이나 화포교사(대포교사) 등이 기술지원이나 지휘관 역할을 수행하는 사람이라면 포수는 직접 화약무기를 발사하는 자이다. 풍천유향에서는 좀더 구체적으로 대포수(大砲手), 조총수(鳥銃手), 신기수(神器手)로 나누어 설명하고 있다.

풍천유향에 따르면 '대포수는 전선에 장치된 화기와 총통의 장진과 발사를 전담하며, 아울러 적선에 미칠 수 있는 장창을 휴대한다. 조총수는 조총을 전담하며, 아울런 장도(쌍수도)를 휴대한다. 신기수는 각종 화전(火箭)을 전담하고 아울러 당파창을 휴대한다.' 고 한다. 또한, '대포수는 앞뒤의 가늠쇠를 잘 조준하여 적을 향해 발사하되, 아래 위와 좌우를 잘 조준해야 한다. 이때 대포를 옮기되, 반드시 기준에 맞게 해야한다. 혹시라도 거리가 맞지 않거나 너무 비스듬히 놓아 차질이 생길 경우에는 참형에 처한다'고 설명하고 있다.

즉, 대포수는 화포교사의 지시에 따라 직접 장전을 하기도 하지만, 장전량이 정확한지 여부는 기본적으로 화포교사의 소관이며, 대포수는 조준을 하는 것이 가장 기본적인 임무라는 것이다.

 

 

6. 노군 (櫓軍, 일명 능로군, 격군)의 편성

노군, 능로군, 격군은 모두 기본적으로 노를 젓는 군사를 말한다.

 

노군, 능로군, 격군

일반적으로 이 세 용어는 같은 용어라고 할 수 있다. 다만, 임진왜란 당시 이순신 장군의 장계에서는 격군(格軍)이란 표현을 주로 쓰며, 이순신의 각종 기록에서 노군이나 능로군이라는 표현은 거의 보이지 않는다. 조선후기에는 격군, 능로군, 노군이란 용어를 혼용한다.

어떤 경우에는 능로군과 격군을 의미상 구별해서 쓰는 경우도 있다.  예를들어 정조실록 3년 3월8일조를 보면 경기 수영 겸 삼도통어영 소속 전선에 탑승하는 승무원 구성표를 제시하면서 능로군(能櫓軍) 28명과 격군(格軍) 96명으로 구별하고 있다.

이처럼 능로군과 격군을 구별해서 쓸 때의 능로군은 단어의 의미 그대로 노를 잘 젓는 군사라는 의미이며, 격군(이두로 곁군의 의미)도 말그대로 노 젓는데 보조역할을 하는 군사란 의미이다.

최두환씨의 『충무공 이순신 전집』에서도 격군을 '재래식 노를 서서 젓거나 허드렛일 하는 사람, 곁군'으로 소개하고, '노군은 노젓는 사람, 능로군은 노를 잘 젓는 사람'으로 소개하고 있다. (최두환, 『충무공 이순신 전집』제6권 p117)

 

노군의 편성

숙종대의 수군변통절목의 각군선제정액수에 따르면 삼도수군통제사 기함과 각 수사 기함을 제외한 일반적인 전선(판옥선)의 경우, 노군 100명이 표준이다. 일반적으로 당시의 표준적인 판옥선은 노가 좌우로 8개식 있었는데, 각 노에 4명식의 노군(櫓軍)과 1명식의 노장(櫓長)이 존재했다.즉 노장과 노군의 전체 인원은 2x8x5=80명이 된다. (16개를 노를 가진 전선의 경우 노장은 16명이 되고, 노군은 64명이 된다) 여기에 추가로 20명은 여군(餘軍:예비 노군)이 된다. 만약 좌우 10개식의 노를 가진 좀 더 큰 대형 전선(판옥선)의 경우 2x10x5=100명이 되어, 여군을 합치면 전체 노군은 120명이 될 수도 있다.

만기요람 분방법도 비슷한 내용을 담고 있어 대체로 조선 후기의 경우 노 1개를 4명이 잡는 것이 표준이었던 같다. 노장(櫓長)이나 여군(餘軍)의 경우는 약간의 편차가 있고 경우에 따라서는 만기요람 분방법처럼 생략하는 것도 가능했던 것 같다.

임진왜란 당시의 노군의 편성은 어떻했을까? 정확한 내역은 알 수 없으나 아직 정식으로 공개되지 않은 『귀선중기 (龜船重記, 임진왜란 중에 쓰여진 것으로 추정)』라는 자료를 부분적으로 인용보도한 신문기사에 따르면, 노가 좌우 각 8개(전체 16개) 있는 거북선의 경우 노장(櫓長) 1명이 좌우 2개의 노를 동시에 관할하여, 노장의 수는 8명이 된다고 한다. 또한, 노장중에 선임 노장에 해당하는 도노장(都櫓長)이란 직책도 존재했다고 한다. 이 자료에 따르면 각 2개 노에 6~8명이 편성된다고 설명하고 있는데, 다시말해 1개 노에 3~4명이 편성된다는 의미일 것이다. 이처럼 4명 표준을 지키지 못하고, 3명이 노 1개를 맡는 경우도 있었던 것은 인원 부족 때문일지도 모른다.

노 1개를 잡는 인원은 3명이든 4명이든 큰 차이가 있는 것은 아니다. 다만, 수군변통절목의 규정처럼 노장 1명이 노 1개를 담당하느냐, 아니면 귀선중기 처럼 노장 1명이 좌우 노 2개를 담당하느냐는 문제는 좀 더 고민해 볼 필요가 있는 주제라고 할 수 있다. 전선(판옥선)을 비롯한 한국의 전통선박은 좌우 노의 움직임을 다르게 함으로써 제자리 회전이나, 급격한 선회기동이 가능하다고 알려져 있다. 이런 식의 선박 운행을 위해 노장 1명이 좌우 노를 동시에 담당하는 것이 효율적인지, 아니면 그렇다해도 좌우 노를 각각 별도의 노장이 담당하는 것이 효율적인지는 좀 더 연구해 볼 필요가 있을 것 같다.

 

 

7. 참모,행정요원의 구성

이상 설명한 항해요원(타공,요수,정수,무상)이나 전투요원(사부,화포장,포수), 노군(능로군,격군)의 경우 약간의 편차가 있지만, 기본적으로 각 자료간에 편성방식이 거의 유사한다.

그러나, 기타 승무원 구성 중 참모,행정요원의 경우 각 자료마다 편차가 크고, 동일 자료에 등장하는 각 함선별로도 차이가 심했던 것 같다.

이를테면 수군변통절목(18세기 초~중엽)상에는 선직 2명, 좌우포도장 2명이 존재한다.

이에반해 수조홀기(18세기 초~중엽)에 등장하는 경상좌수영의 규정을 보면 경상좌수사 기함의 경우 선직이나 좌우포도장 같은 직책은 없으며 대신 병선감관 1명, 지구관 6명, 포수초관 1명, 기패관 겸 도훈도 2명 등 총 10명의 참모 및 행정요원이 추가로 탑승한다. 기타 경상좌수영 소속 전선의 경우 역시 선직이나 좌우포도장 같은 직책은 보이지 않으며 대신 기패관 2명과 도훈도 1명이 탑승한다. 수조홀기에는 항해요원도 모두 누락되어 있으므로, 좌우포도장이나 선직이 누락되었다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만기요람(19세기 초)상의 규정에도 경상좌수영의 경우 포도장(포도원,포도관)과 선직이란 직책이 아예 보이지 않아, 18~19세기에 걸쳐 경상좌수영 소속 함선에는 일관되게 아예 포도장이나 선직이란 직책이 없었음을 알 수 있다.

이에 반해 18세기 후반에 발행한 전라우수영지(1787년)의 규정을 보면, 당시 전라우수영 소속 전선(판옥선)은 선직 2명, 좌우포도장 2명이 존재하여 수군변통절목의 규정을 충실히 따르고 있다.

19세기 중엽에 발행된 호좌수영지(1847년)의 규정을 보면, 당시 전라좌수영 소속 전선은 선직 1명, 포도관 2명 외에 기패관 2명과 훈도 1명이 추가로 탑승하고 있다. 호좌수영지이 쓰여진 것은 1847년이지만, 1636년 3월에 건조된 숙자 제1호 판옥전선과 1737년 3월에 건조된 숙자 제6호 판옥전선의 경우에도 선직 1명, 포도관 2명, 기패관 2명, 훈도 1명이 탑승한 것으로 나타나 전라좌수영 소속 함선의 경우 처음부터 수군변통절목과 상관없이 부대 자체의 전통적인 편제를 200여년간 고집했음을 알 수 있다.

경기 수영 내지 삼도수군통어영 (경기,충청,황해도 3도 통합해군사령부) 소속 인원 규정을 보아도, 삼도수군통제영 소속 수군(경상 좌우, 전라 좌우)과는 전혀 다른 직책이 다소 보인다. (충청도 수군은 인조대의 삼도수군통어영 창설 이후 삼도수군통제영 소속에서 삼도수군 통어영으로 소속이 변경되었다) 아래 규정이 모두 함선 1척에 탑승하는 인원은 아니나, 상장초관이나 하장초관 처럼 다른 자료에 보이지 않는 특이한 직책을 다수 발견할 수 있다. 삼도수군 통어영 자체의 편성이 이 정도라면 삼도수군 통어영 소속 함선의 승무원 구성에도 독특한 특색이 있었을 것이다.

정조실록 정조3년 3월8일조-전선의 선장(船將) 1인, 병선감관(監官) 1인, 상장 초관(上粧哨官) 1인, 하장 초관(下粧哨官) 1인, 병선 초관(兵船哨官) 1인, 포도관(捕盜官) 3인, 타공(舵工) 5명, 능로군(能櫓軍) 28명, 격군(格軍) 96명, 사수(射手) 48명, 포수(砲手) 41명, 육물 고자(六物庫子) 1명, 각색 장인(各色匠人) 9명, 각초(各哨)의 서기(書記)·인기수(認旗手)·사후(伺候) 등 군(軍) 13명, 도합 2백 49명. 교련관(敎鍊官) 2인, 기패관(旗牌官) 12인, 군수 감관(軍需監官) 1인, 영리(營吏) 2인, 군기색(軍器色) 2인과 고자(庫子) 2명, 군량색(軍粮色) 3인과 고자(庫子) 3명, 군뢰(軍牢) 4명과 순령수(巡令手) 6명, 등롱수(燈籠手) 8명, 사령(使令) 2명, 나장(羅將) 4명, 중영 군뢰(中營軍牢) 2명과 순령수(巡令手) 4명, 도훈도(都訓導) 2인, 교사(敎師) 1인, 별파진(別破陣) 1인, 쟁수(錚手)·고수(鼓手)·열발수·호총수(號銃手) 등 4명, 도합 65명

이처럼 행정요원이나 참모요원의 경우 시대별로, 혹은 부대별로, 혹은 각 함선별로도 편차가 심했던 것 같다. 이들 참모,행정 요원의 구체적인 임무나 역할도 차이가 심했을 것이다.

 

선직 (船直)

선직(船直)이란 직책 중에 직(直)자는 우리나라에서 '(창고)지기'란 의미로 많이 사용되는 이두어이다. 따라서, 선직(船直)이란 '배지기' 다시말해 배를 관리하고 지키는 사람을 의미할 것이다. 최두환씨도 선직이 '배지기, 배를 관리하는 사람'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최두환,『충무공 이순신 전집』 제6권, p117) 이들 선직은 정박시 각종 배의 비전투손실을 방지하는 역할을 기본적으로 가지고 있었을 것이다. 이외에 배 자체를 훔쳐가는 경우는 생각하기 어려우므로, 이들 선직(船直)의 임무 중에 하나는 배안에 실린 각종 화물(식량,무기 등)을 지키는 일일 것이다. 만기요람이나 수조홀기 등을 보면, 경상좌수영이나 경상우수영에서 선직이 없고 대신 선고직(배창고지기)이란 명칭을 사용한 것도 그 때문일 것이다. 숙종대에 수군변통절목을 제정할 당시에는 전선(판옥선) 1척에 선직 2명식의 정원을 규정했으나, 세월이 흐르면서 이런 규정은 제대로 준수되었던 것 같지는 않고, 전선(판옥선)이나 거북선급의 대형 함정에 선직 1명식을 탑승시키는 것이 고작이었던 것 같으며, 그나마 일부 수영에서는 아예 선직,선고직이 탑승하지 않는 경우도 있었던 것 같다.

선직의 신분은 어느 정도였을까? 서술의 편의상 선직을 참모, 행정요원편에서 설명했으나, 통상 조선시대의 용례상 직(直:지기)자가 붙은 직책은 낮은 신분이며, 명백하게 양반이 아니라 일반 상민이나 양민 수준이었을 것이다.

 

좌우 포도장 (左右 捕盜將) - 일명 포도관, 포도원

수군변통절목(18세기 초~중엽)에는 전선(판옥선) 1척에 좌,우 포도장이 각 1명식(총 2명) 탑승한 것으로 나와있다.

그러나, 이미 설명했듯이 수조홀기(18세기 초~중엽)와 만기요람(19세기 초)을 보면 경상좌수영 소속 함선에는 포도장 혹은 이와 유사한 직책을 가진 사람이 탑승한 사례가 전혀 없다.

전라우수영의 경우 18세기말을 기준으로 전선 1척에 좌우포도장 각 1명식(총 2명)이 탑승했다. 전라좌수영의 경우 17~19세기에 걸쳐 포도관이 전선에 각 2명식 탑승한 것으로 나와있다.

최두환씨는 '포도관이란 도둑질하는 사람을 잡아 처리하는 사람, 헌병'이라고 소개하고 있다. (최두환,『충무공 이순신 전집』 제6권, p117) 그러나, 최두환씨는 특별하게 문헌적 근거를 제시하지는 않고 있으며, 다만 한자상의 의미로 그렇게 해석한 것 같다. 사실 그 이상 달리 해석할 여지도 없다.

포도장의 신분은 어느 정도일까? 각종 자료에서 포도장,포도관이 등장하는 순서를 보면 초관이나 군관에 뒤이어 등장하고 있어 포도장은 최하급 무관 정도이거나 아니면 중인급 정도의 신분인 것 같다.

이러한 좌우 포도장이 임진왜란 당시의 판옥선에도 탑승하고 있었을까? 현재의 자료로는 긍정도 부정도 할 수 없다. 다만, 이순신의 각종 기록에 좌우 포도장이란 직책은 단 한번도 등장하지 않는다.

 

기패관(旗牌官)과 지구관

최두환씨는 '기패관이 깃발 등의 신호를 담당한 사람'이라고 소개하고 있다. (최두환,『충무공 이순신 전집』 제6권, p117) 조선시대의 각 군영들은 신호용 깃발 뿐만 아니라 각종 명령패, 부신, 신분증명서 등을 다수 취급하게되는데, 기패관은 그런 것들을 취급하는 직책이었을 것이다.

기패관은 비록 수군변통절목상의 편성에는 없지만, 수조홀기나 호좌수영지의 승무원 편성에는 나온다.

수조홀기(18세기 초~중엽)에 따르면, 경상좌수영의 모든 전선(판옥선)에는 기패관 2명이 탑승한다. (경상좌수영 기함 및 경상좌수영 직할 제3호 판옥선과 제4호 거북선에는 기패관 겸 도훈도 2명이 탑승한다) 호좌수영지(19세기 중엽)에 따르면, 전라좌수영의 모든 전선(판옥선)에도 기패관 2명이 탑승한다.

전라우수영 소속 함선의 경우 직접적으로 승무원 구성표에 기패관이 등장한 사례는 없지만, 만기요람의 전라우수영 편제를 보면 전라우수영 전체에 기패관 25명이 소속되어 있으므로 전라우수영 기함을 포함한 중요 함선에는 최소한 기패관 1명 이상이 탑승했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다만, 만기요람에 따르면 경상좌수영 소속 기패관이 70명, 전라좌수영 소속 기패관이 60명인데 반하여, 이보다 함대 규모가 더 큰 전라우수영 소속 기패관은 불과 25명 밖에 되지 않는다. 따라서, 전라우수영 소속 모든 전선에 기패관이 탑승했을 것으로는 생각되지 않으며 기함을 포함한 중요 함선에만 기패관이 탑승했을 것이다.

이들 기패관은 어느 정도의 신분일까? 수군 기패관에 대한 직접적인 규정은 없으나, 만기요람에 따르면 훈련도감이나 금위영, 어영청 소속 기패관의 경우 행오(일반 병사) 중에서 뽑았다고하며, 승진의 한계는 6품으로 되어 있다. 수군의 기패관도 이들 훈련도감 등의 기패관과 크게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즉, 중인 내지 최말단 무관 정도의 신분이었을 것이다.

지구관의 경우 기패관과 비슷한 성격의 직책이지만, 기패관 보다는 지구관이 조금 더 높은 직책이다. 기패관과 마찬가지로 수군 뿐만 아니라 육군인 훈련도감, 금위영, 어영청에도 지구관이란 직책이 존재했다. 수군에서는 수조홀기(18세기 초~중엽)를 보면, 경상 좌수사 기함에 지구관 6명이 탑승하는 것으로 나와있다. 비록 다른 기록상으로는 보이지 않으나, 경상좌수사 기함 뿐만 아니라 전라 좌수사 기함(호좌영 좌선), 전라 우수사 기함(호우영 좌선), 삼도수군 통제사 기함(통영상선)에도 당연히 지구관이 승선했을 것으로 생각된다.

임진왜란 당시에도 기패관이나 지구관이란 직책이 존재했을까? 일단, 천총, 파총, 초관, 지구관, 기패관 같은 직책들은 명나라 군편제, 특히 척계광류의 분위기를 풍기는 직책들이다. 따라서, 이러한 명칭의 직책들은 기효신서 수입으로 명나라식 병법과 편제를 수용한 뒤에 출현한 것이다. 당연히 임진왜란 당시 수군에는 기패관이나 지구관이란 직책이 없었을 가능성이 높다. 만약 기패관이나 지구관 같은 직책이 존재했다해도, 그 출현 시기는 정유재란 이후일 것이다.

 

도훈도 훈도, 도진무 진무

훈도와 진무는 각 군영에 소속된 최하급 군인 내지 아전이다. 훈도와 진무는 군관, 지구관, 기패관보다 신분이 다소 낮아 양반은 아니며, 대체로 중인~상민(양인)에 속한다.  

풍천유향(1778년)을 보면 '영리(군영의 아전),진무는 글을 볼줄 알고 계산에 밝으며 글씨를 잘 쓰는 자로 특별히 선발하되, 겸하여 활쏘기 혹은 봉쓰는 법을 익히게 한다'고 설명하고 있다. 원래, 아전 중에 상당수는 신분상 세습되는 것이 원칙이지만, 이처럼 군인적 성격이 강한 아전 직책은 세습이 아니라 선발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호좌영사례(발행연도 미상)를 보면 전라좌수영의 편성을 설명하면서 '진무 겸 훈도 57인'으로 나와있어 진무와 훈도가 거의 비슷한 직책임을 보여준다.

수조홀기(17세기 초~중엽)에 따르면 경상좌수영의 각 전선에는 도훈도 1명식이 탑승하며, 경상좌수사 기함 및 경상좌우영 3호 전선, 경상좌우영 4호 거북선에도 기패관 겸 도훈도 2명이 탑승한다. 호좌수영지(1847년)에 따르면 전라좌수영 소속 각 전선에는 훈도 각 1명식이 탑승한다.

원래 훈도 중에 선임자가 도훈도(都訓導)이며, 진무 중에 선임자가 도진무(導鎭撫)이다. 하지만, 조선 후기에는 이러한 구별법이 다소 애매해진 것 같다. 수조홀기와 만기요람을 보면 경상우수영에는 도훈도는 존재해도 훈도는 없으며, 만기요람을 보면 전라좌수영에선 훈도는 존재해도, 도훈도는 없기 때문이다. 아마도 지구관, 기패관 처럼 유사한 직책이 새롭게 출현하면서 도훈도,훈도,도진무,진무의 구별이 애매해지는 상황하에, 경상좌수영에서는 도훈도란 명칭만, 전라좌수영에서는 훈도란 명칭만 사용했던 것 같다.

군영의 직책이 아닌, 함선 내 보직으로 도훈도 훈도는 어떤 임무를 가진 직책일까? 정확한 임무와 역할을 알 수는 없으나, 전라우수영 처럼 함선내 보직으로 도훈도나 훈도가 없는 경우도 있는 것으로 보아 그렇게 중요한 직책으로 생각되지는 않는다. 대체로 도훈도와 훈도는 해당 함선 내에서 잡다한 행정실무를 총괄하는 직책으로 짐작되지만, 함선 운행이나 전투와 관련된 특정 임무를 맡았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는 없다.

최두환씨는 훈도관에 대해 '잘잘못을 가르쳐서 일을 잘하도록 가르치는 사람'이라고 소개하고 있으나, 이는 한자의 뜻풀이에 불과한 주장이다.  (최두환,『충무공 이순신 전집』 제6권, p117)

 

이순신의 각종 일기나 장계에서 임진왜란 초(1592년)부터 도훈도, 훈도, 도진무, 진무 등이 등장하고 있어, 이들 직책이 조선 전기 부터 존재했음을 알 수 있다. 이순신 기록상에 등장하는 진무들은 활쏘기에 참여하거나, 혹은 군관과 함께 문서전달을 위해 파견되며, 혹은 정찰을 위해 파견된 사례도 볼 수 있다.  이들 도진무와 진무 등은 기본적으로 각 수영이나 군영의 직책이지, 함선 내 보직 - 다시말해 승무원 편성상의 직책은 아니다. 예를들어 '당포파왜병장'을 보면 진무 김종해가 사도 1호선의 사부(射夫), 진무 장희달도 사도 1호선의 사부라고 나와있다. 즉, 김종해와 장희달은 평상시에 사도첨사진의 진무이지만, 전시에는 사도 1호선의 사부 자격으로 승선하고 있는 것이다. '부산포파왜병장'을 보아도 진무 구은천이 본영 우후선의 사부로 나와있다. 즉, 각 군영에 소속된 최하급 군인 내지 아전인 진무는 평상시에는 행정적인 업무를 담당하지만, 부가적으로 활쏘기를 연습하여 전시에는 상당수가 전선의 사부(射夫)로 승선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훈도나 진무가 함선내 보직인 것처럼 보이는 기록도 몇차례 찾아볼 수 있다. 예를들어 '견내량파왜병장'을 보면 수군 김봉수가 본영 2호선 진무로 나오며, 본영 3호선 진무 이자춘이라는 자와 광양선 도훈도 김온이란 자도 보인다. 또한 '당포파왜병장'을 보면 정병 진춘일이 흥양선의 훈도로 나온다. 조선 후기의 일부 기록에서도 도훈도 혹은 훈도가 승무원 직책으로 나오는 경우가 몇차례 있는 것으로 보아, 이들 도훈도, 훈도, 도진무, 진무가 그 직책 그대로 함선 편성상의 승무원 직책으로 임명된 경우도 있는 것 같다.

이들 조선 전기의 도훈도, 훈도, 도진무, 진무가 군영의 직책이 아닌 함선내 직책으로 임명되었을 때, 이들은 어떤 임무를 맡았을까? 조선 전기의 군제에는 지구관이나 기패관이란 직책이 없었던 것 같다. 따라서, 조선 후기에 지구관이나 기패관이 맡았던 업무들 (깃발 및 부신, 명령패에 관련된 업무처리)중의 일부도 도훈도, 훈도, 도진무, 진무들이 담당했을 것이다. 이외에 조선 후기와 마찬가지로 함선 내 잡다한 행정실무도 도훈도, 훈도, 도진무, 진무의 소관이었을 것이다.

또한, 조선 전기에는 이순신 장계에서 볼수있듯이 각 군영의 진무가 각 함선의 사부(射夫)로 탑승하는 경우를 볼 수 있는데, 이처럼 조선 전기의 진무가 군인으로서의 성격이 강하다면 진무나 도진무가 함선내 전투와 관련된 특정 임무를 맡았을 가능성도 있다. 예를들어 '당포파왜병장'의 전사상자 목록을 보면 우후선의 방포진무(放砲 鎭撫) 장언기라는 자가 보인다. 이 방포 진무가 정확하게 무슨 임무를 가진 직책인지는 알 수 없으나, 진무 중에서 함선 내에서의 화약무기와 관련된 특정 임무를 맡은 자가 있었음을 보여주는 기록이다.

 

기타

이상의 설명은 비교적 여러 자료에 자주 나타나는 직책들만 설명한 것이며, 삼도수군 통제사 기함이나 각 수영 기함에는 여기에서 언급하지 않은 잡다한 직책들도 많았을 것이다. 송규빈은 풍천유향에서 통영상선 (삼도 수군 통제사 기함)에 탑승하는 총 인원수가 668명이라고 언급하고 있다. 이 668명이라는 수치는 기존 자료의 통영상선 정원 규정 200명 내외의 3배에 달하는 것이어서, 다소 의심스럽기는 하지만, 어쩌면 수군 합조(통제사 소속 수군의 연합기동훈련)시에는 통영상선에 실제 668명이 탔을지도 모른다. 송규빈은 그 668명에 잡색군과 군뢰, 나장, 순령수, 고수 같은 잡다한 보직들이 모두 포함되어 있다고 설명하고 있다.

 

 

8. 임진왜란 당시 전선(판옥선)의 승선인원 구성

 

각 사료에 대한 검토

위 각 항목에서도 임진왜란 당시의 승선인원에 대해서 부분적으로 설명했다. 여기서는 좀 더 종합적으로 임진왜란 당시의 승선인원을 추정해 보자. 이순신이 전선(판옥선)의 승무원 구성에 대해 직접적으로 언급한 적은 없다. 다만, 간접적으로 유추해 볼 수 있는 기록은 몇 차례 있다.

1592년 12월10일 이순신은 조정에 해당 징병 대상자가 없을 경우, 이웃이나 친척을 징병하는 것을 계속 허용하게 해달라고 요청한다. 그 요청을 담은 공문이 바로 '청반한일족물침지명장(請反汗一族勿侵之命狀)'이다.

사료 8-1 임진장초 선조 25년 12월 10일자, 청반한일족물침지명장 (請反汗一族勿侵之命狀)

신이 이미 수영과 각 진포에 명령을 내려 추가로 (배를) 많이 건조했습니다. 배 한척에 사부와 격군이 모두 130명인데, 아직 그것을 충당하지 못했습니다.

臣已令營及鎭浦 多數加造 而一船射格 幷一百三十餘名之軍 充之未由

이 자료는 1592년 말의 기록이며, 현재로서는 판옥선의 승무원 총수와 관련된 최고(最古)의 기록이다. 이순신이 이 계본에서 말한 사격(射格)이 판옥선 승무원의 총칭인지, 아니면 말그대로 사부 + 격군 수만 제시한 것인지는 불확실하다. 여하간 이 계본을 통해 1592년의 전라좌수영 소속 판옥선의 정원이 최소 130여명에 달한다는 사실은 확인할 수 있다.

 

이순신은 1593년에 윤11월17일에 해안지역의 병력과 저장된 식량은 해군에 소속시켜 달라고 요청한다. (사료 8-2)

사료 8-2 임진장초 선조 26년 윤11월 17일자, 청연해군병양기전속주사장(請沿海軍兵糧器全屬舟師狀)

(전라) 좌우도에서 전선은 더 많드는 것이 전선이 모두 150여척이며, 사후선과 협선이 150척으로 사부와 격군이 29000여명이나 소요됩니다. (중략) 이 도(경상도)에서 전선은 더 만드는 것이 모두 40척이며, 사후선과 협선이 40여척이어서 사부와 격군을 아울러 무러 6000여명이나 소요됩니다.

左右道戰船造 幷一百五十隻 伺挾船 一百五十隻 射格幷無慮二萬九千千餘名 (중략) 道戰船加造 幷四十餘隻 伺挾船四十隻 射格幷無慮六千餘名

이 수치는 전선과 사협선(아마도 사후선 + 협선)과 수치를 합산한 것이어서, 전선(판옥선) 1척당 승선인원을 추정하기는 조금 어렵다. 다만, 사후선이나 협선의 경우 조선 후기를 기준으로 협선은 대략 3명, 사후선은 5명이 승선한다. 일단 5명으로 잡으면 사후선과 협선에 승선할 병력은 5x150 =750명이다. 남는 28250명을 모두 전선 150척에 소요되는 병력으로 간주하면, 전선 1척당 약 188명이 된다. 경상도의 경우 같은 방식으로 사후선과 협선에 승선할 병력은 5x40=200명이다. 남는 5800명을 전선 40척에 소요되는 병력으로 간주하면 전선 1척당 145명이 된다. 전라도 수군과 경상도 수군의 전선 1척당 병력 수에 차이가 나는 것은 다소 이상하지만, 어쩌면 단순 계산상의 오류일수도 있고, 전라도 전선과 경상도 전선의 크기나 승무원 구성 차이에 따른 차이일수도 있다. 여하간 대략 이순신은 전선 1척당 대략 145~188명이 필요하다고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아래 기록은 1595년에 명나라의 요동도지휘사가 우리나라에 조선의 병력현황을 질문한데 대한, 조선측의 공식 답변 중의 일부이다. 이 기록은 지금까지 그렇게 주목받지 못했으나 필자가 보기엔 상당히 중요한 기록으로 생각된다.

사료 8-3, 사대문궤, 요동도지휘사자조선국왕, 사조본국군병, 회회차조

- 이순신 포/궁수 717명, 초수군(소3072명, 전선 26척, 귀선 5척, 초탐선 31척

- 이억기  궁수/포수 55명, 초수군 398명, 전선 10척, 초탐선 10척

이 기록상에 이억기 함대는 극도로 약세로 나오는데, 일단 이억기 함대는 제외하고 이순신 함대만 분석해 보자. 초탐선의 경우 정확한 승선인원을 알 수 없으므로 일단 제외하자. 전선(판옥선)과 귀선(거북선)의 총수는 31척이다. 초수군(X水軍, 나무끝 초자)경우 우리나라에선 거의 사용하지 않는 용어지만 격군과 사공을 포함한 비전투요원을 의미하는 것으로 생각된다. 초수군 3072명이라면, 전선과 거북선 1척당 대략 99명의 초군이 승선하게 된다. 여기에 초탐선의 정원을 감안하면, 실제 전선/거북선 1척당 비전투요원은 99명 이하가 될 것이다. 포궁수는 사부와 방포를 포함한 전투요원을 의미할 것이다. 역시 같은 방식으로 계산해 보면 전선/거북선 1척당 대략 23명이 된다. 전투요원의 경우에도 초탐선 31척에 승선하는 요원을 감안하면 실제로는 23명보다는 적었을 것이다. 결국 전선/거북선 1척당 총 승선인원은 99 + 23 = 122명 이하가 된다. 물론, 달리 해석할 여지도 있다. 전선/거북선을 비록 31척 보유하고 있지만, 승무원이 모자라서 몇 척은 운용을 안하는 상황도 생각해 볼 수 있다. 이 경우 전투요원과 비전투요원은 수는 99 + 23명 보다는 조금 더 늘어날 것이다.

 

다음 사료는 1597년 일본의 지휘관들이 조선 수군에 관해 대화한 내용을, 간첩이 조정에 보고한 내용이다.

<사료 8-4, 선조실록, 선조 30년 2월23일자 도원수 권율의 치계>

(가등)청정은 처음에는 서명을 하지 않고 묻기를 "조선의 전선(戰船)은 배 한 척에 몇 명의 병력을 실을 수 있는가?" 하니, 정성(正成) 등이 "내가 출입하는 자들로부터 상세히 들었는데, 배 한 척에 실을 수 있는 인원은 노군(櫓軍) 1백 50명, 사수(射手) 1백명, 화포군(火砲軍) 60명이라고 한다."

이 대화에 나오는 수치를 합치면 전선(판옥선) 1척에 최대 승선 가능한 수는 310명이 된다. 이 수치는 당시 조선 수군 전선의 표준적인 승선인원수라고 생각되지는 않으며, 굳이 싣는다면 310명까지도 가능하다는 의미로 생각된다. 조선 후기의 통영상선의 경우 최대 668명이 승선했다는 기록(풍천유향)이 있으므로, 310명이 승선 가능하다는 내용이 오류는 아닌 것 같다.

 

다음 사료는 1597년, 경상관찰사가 조정에 보고한 내용이다.

<사료 8-5, 선조실록, 선조 30년 3월18일 경상관찰사 이용순의 치계 중 인용부분>

본현(本縣)의 판옥선(板屋船)에 사수(射手)·격군(格軍) 등 하솔(下率) 1백 40여 명을 싣고 현령이 직접 거느리고서 바다로 나아갔습니다.

이 보고에 따르면 경상 우도 소속 한 전선이 140여명을 싣고 출동했다는 것이다. 이 기록에 보이는 140여명이, 이순신의 계본(사료 8-2)에서 역산한 경상도 소속 전선 1척당 승선인원 145명과 비슷하다는 점은 흥미롭다.

 

다음 사료는 부체찰사 한효순이 1597년에 조정에 보고한 내용이다.

<사료 8-6, 선조실록, 선조 30년 5월13일 부체찰사 한효순의 치계>

대략의 내용은 삼도(三道)의 전선(戰船) 중에 현재 진중에 있는 배가 1백 34척이고, 격군(格軍)이 1만 3천 2백여 명이란 것이었다.

이 보고에 따르면 수군 통제 예하의 전선이 모두 134척이고, 그 배의 격군이 1만3천2백명이라는 것이다. 전체 정원은 알 수 없지만, 결국 전선 1척당 대략 100명 정도의 격군이 승선했음을 알 수 있다.

 

다음 사료는 임진왜란 종전후인 1602년 선조와 윤승훈이 나눈 대화 내용이다.

<사료 8-7, 선조실록, 선조 35년 2월2일 영사 윤승훈과 선조의 대화>

격군(格軍)은 4번으로 나누어 세웠는데, 1번이 겨우 50인입니다. 매양 50일마다 서로 교체하므로 원망하고 고달파하니 또한 계속하여 세우기도 어렵습니다.

격군은 4교대로 하고 있는데, 한번에 투입되는 인원이 겨우 50명 밖에 안된다는 내용이다. 대화의 내용으로 보아 격군 50명이 통상적인 경우라고 보기는 어려우며, 격군이 50명 밖에 안되어 모두들 원망하고 고달파한다는 의미일 것이다. 16개의 노를 가진 표준적인 전선(판옥선)에 노 1개당 3명이 투입되면 48명이 된다. 결국 50여명이라는 수치는 운행가능한 거의 최저치라고 할 수 있다.

 

아래 사료는 역시 임진왜란 종전후인 1605년에 순변사 이시언이 조정에 보고한 내용이다.

<사료 8-8, 선조실록, 선조 38년 6월 7일 순변사 이시언의 치계>

충청도의 전선(戰船) 10척을 예로 들면 1척의 격군(格軍)이 1백 명이다.

즉, 충청수군 소속 전선(판옥)은 1척당 격군이 100명이라는 것이다. 이 격군 100명이라는 숫치는 1597년에 한효순이 조정에 보고한 내용(사료 8-5)과 일치한다.

 

아래 사료는 1606년, 일본에 파견할 사신이 탑승할 배의 격군에 관해 보고한 내용이다.

<사료 8-9, 선조실록, 선조 39년 11월 12일 통제사 이운룡의 치계>

상사·부사가 타고 갈 선척의 체제가 상당히 커서 좌우의 노(櫓)를 각각 9짝씩 배열해야 되는데, 노 하나마다 격군 3명씩을 정급(定給)한다면 1척의 배에 병졸이 54명입니다. 이로써 추산하면 4척의 배에 충당될 격군의 수가 거의 2백여 명에 이릅니다.

이 사신이 탈 배는 노가 좌우 각 9개(18개)이므로, 노 1개당 3명식 담당하면 1척당 격군이 54명이 소요된다는 내용이다. 노 1개당 3명이라면, 이는 조선 후기의 일반적인 격군 배치 (노 1개당 4명)보다는 적은 수치이지만, 1602년의 기록(사료 8-6)에서도 비슷한 사례는 있다. 어차피 대한해협을 횡단할 정도의 항해라면, 노군의 인력보다는 바람이 더 필요하므로, 굳이 4명을 배치하지 않고 3명을 배치한 것으로 생각된다.

 

아래 사료는 삼도수군통제사 이운룡이 1606년에 조정에 보고한 내용이다. 아래 인용한 부분은 이운룡이 발언한 것이 내용이 아니라 나대용이 주장한 내용을 이운룡이 인용한 부분이다. 나대용은 이순의 거북선 제작에 협조한 인물로 알려져 있고, 이순신의 군관이기도 했다. 이 때문에 1606년의 이 기록은 임진왜란 당시의 거북선과 판옥선 승무원 총수를 파악하는데, 매우 중요한 사료로 간주되고 있다.

<사료 8-10, 선조실록, 선조 39년 12월 24일 통제사 이운룡의 치계> (나대용의 편지를 인용한 부분)

거북선[龜船]은 전쟁에 쓰기는 좋지만 사수(射手)와 격군(格軍)의 숫자가 판옥선(板屋船)의 1백 25명보다 적게 수용되지 않고 활을 쏘기에도 불편하다.

즉, 거북선은 좋기는하나, 병력소요가 판옥선의 125명과 비슷하며, 병력이 너무 많이 필요한 것이 단점이라는 것이다. 이는 다시말해 임진왜란 당시의 판옥선의 승무원 소요인원이 적게잡아도 125명이라는 소리이며, 거북선도 그와 비슷하다는 것이다. 많은 학자들이 이 자료를 임진왜란 당시의 판옥선 승무원 수의 절대적인 기준으로 삼고 있다. 하지만, 필자는 이 기록을 굳이 절대적인 기준으로 삼을 필요는 없다고 본다. 나대용은 판옥선보다 적은 병력으로도 운용할 수 있는 창선을 발명하여 그 장점을 강조하면서, 거북선은 아무리 적어도 125명은 탑승해야한다는 점을 강조한 것이 바로 위의 기록이다. 여러 기록을 보면 알 수 있겠지만, 당시 판옥선의 승선인원은 관행과 상황에 따라 상당히 편차가 심했던 것으로 생각된다. 전선(판옥선)의 정원이 130여명, 140여명, 145명, 188명으로 간주할 수 있는 기록들도 있음은 위에서 이미 살펴본 대로다.

 

아래 기록은 역시 임진왜란 종전 후인 광해군대의 기록이다.

<사료 8-11, 광해군 일기, 광해군 3년 11월 24일 광해군과 경상감사 송영구의 대화>

주사의 일은 신(송영구)이 일찍이 체찰사(體察使)의 종사(從事)가 되어 왕래하였기 때문에 신이 자세히 알고 있습니다. 배 1척에 격군(格軍)이 1백 20명이므로 10척이면 1천 2백명이 속하게 됩니다.

경상도관찰사 송영구는 상당히 자신있게, 배 1척당 격군이 120명이 필요하다고 증언하고 있다.

 

필자의 추정

이상에서 본 바와 같이, 당시 전선(판옥선)의 정원은 적게 잡아도 최소한 120명 이상이며, 평균적으로는 120~140명 정도가 탑승한 것으로 추정된다. 물론, 이순신은 188명(추정치)까지 필요하다고 주장한 적이 있고, 일본 장군들은 조선의 전선에 최대 310명까지도 승선할 수 있는 것으로 알고 있었다. 따라서, 120명 정도가 탑승한 것은, 그것이 적당해서가 아니라, 병력이 부족한데 따른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우선, 임진왜란 당시의 전선(판옥선)에 항해요원 8명을 모두 채웠던 것 같지는 않다. 전반적으로 병력이 극도로 부족했던 것으로 추정되므로, 항해요원 중에도 일부는 줄였을 가능성이 높다. 타공 2명은 줄일 수 없으므로, 무상, 요수, 정수의 경우 조선 후기의 정원인 2명이 아닌 1명식 탑승한 경우도 있었을 것이다. 앞에서도 이미 설명했듯이 임진왜란 당시의 용어로는 사공과 무상만 존재한다.(항해 요원편 참조)

전투요원의 경우 임진왜란 종전후 조선 후기의 경우 사부가 18명, 화포장이 10명, 포수가 24명이 표준이다. 사실 판옥선에 탑재가능한 화포수를 고려해보면 포수 24명은 거의 하한선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1595년의 기록에서 이순신 함대의 포수와 궁수 합계는 전선/거북선 1척당 23명 이하에 불과했다. (사료 8-3) 결국 사부 + 화포장 + 포수의 합계가 23명이 안되었다는 의미일 것이다. 물론, 위에서 언급했듯이 병력부족으로 배 몇 척을 아예 운용하지 않았다면 1척당 운용가능한 병력수는 조금 더 늘어날 수도 있다. 이 경우 좀 더 구체적으로 사부와 화포장(방포장), 포수(방포)의 비율은 어떻게 될까? 이순신 함대 정도의 화력전을 수행하려면 양현에 대략 6~8문 정도의 화포를 운용할 수 있어야 하므로,  화포장 + 포수는 최소로 잡아도 18명은 되어야 할 것이다. 최소 추정치 23명에서 18명을 제외하면 사부는 5명 밖에 없게 된다. 결국 이런 모든 점을 고려하면 당시의 포수(방포)가 한가하게 화포장(방포장)의 장전을 기다릴 정도의 여유는 없었을 것 같고, 화포장(방포장)과 포수(방포) 할 것 없이 정신없이 장전과 발사를 해야할 정도로 병력이 부족했을 것이다. 나아가 사부의 경우에도 일반적인 활 사정거리 밖에서의 교전에서는 화포장(방포장)과 포수(방포)를 도울 수 밖에 없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격군의 경우 우선 임진왜란 당시의 전선(판옥선)은 대략 16개 노가 표준이며, 경우에 따라 14개 노를 가진 전선도 존재했던 것 같다. (판옥선의 구조적 측면에 대해서는 별도로 논할 기회가 있을 것임) 조선 후기에는 18개 노, 20개 노, 24개 노를 가진 전선도 출현했지만, 임진왜란 당시에는 기껏해야 20개 노를 가진 전선이 1~2척 존재했을 것이다. 일단 16개 노를 가진 전선의 경우 1노당 3~4명으로 잡으면 병력 소요는 56~80명이 된다. 여기에 노장을 8명으로 잡을 수 있다. 여기에 약간 여유를 부려 예비 노군(여군)이 존재할 경우 병력 소요는 100명을 넘어설 것이다.  임진왜란 직후의 일부 자료에서 격군만 120명으로 계산한 것은 노 1개당 4명 + 노장 + 여군 등 완편 편성을 갖추었을 때를 기준으로한 수치인 것 같다.

마지막으로 다음과 같은 승선표를 제시할 수 있다. 누차 설명했지만 임진왜란 당시의 승무원 구성은 상당히 편차가 심했던 것으로 보이므로, 이러한 승무원 구성표가 절대적인 것은 아니다.

 

 

 (선장)

 선직

 사공 +  무상  

도훈도,훈도 도진무,진무

 사부 (사군)

        방포장

  방포

  격군

  계

전선

    1

   ?

   5~8

       ?

             대략 23~40명

 56~120

 120~188

 

위 편성표 상에는 누락되어 있지만, 각 함선에는 군관들도 탑승했을 것이다. 군관의 경우 어떤 표준적인 규정은 없었겠지만 수사급 기함이라면 최소한 1명 이상식은 탑승했다고 장담할 수 있으며, 최대 5~6명에 육박했을 가능성도 없지 않다. 이러한 참모 및 행정요원을 모두 합하면 어쩌면 위 추정치에서 추가로 10명 정도의 인원이 탑승할 경우도 있었을 것이며, 이들은 전투시에 당연히 사부(射夫)의 역할을 수행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