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간조선 1999.11.19

 

'작품? 알아, 이름? 몰라' 베스트셀러 작가들, 재평가 필요

이우혁(34)이라는, 아는 사람만 아는 작가가 쓴 ‘퇴마록’은 94년초 1권 이후 최근 14권까지 총 500만권 이상이 팔려나갔다. 책이라는 게 집안 식구가 한권 샀을 때, 다른 식구가 다시 구입하는 일은 극히 예외적인 경우이므로 1가구를 통상 4명으로 잡는다면, 대한민국 2.3가구에 1권 꼴로 ‘퇴마록’을 소유하고 있다는 계산이 나온다.

▲ 이우혁씨(왼쪽)와 김상옥씨.
그러나 사람들은 ‘퇴마록’은 알아도 ‘이우혁’이란 이름을 알지 못한다. 결론부터 얘기하자면 어느 평론가도, 또 어느 문학담당 기자도 이런 ‘대중 소설’에 진지한 애정을 기울이지 않기 때문이다. 오히려 ‘외면’에 가깝다. 만화라는 장르가 이미 유수 중앙일간지 지면을 통해 대중문화의 한 요소로 당당히 인정받게 된 현실에 비춰 보아도 언뜻 이해하기 힘든 현상이다.

'그저 그런' 작품 쯤으로 치부되지만, 대중의 사랑을 ‘확실하게’ 받고 있는 소설들이 우리 주위에는 상당히 많다. 대학 문예창작과 출신의 40대로만 알려진 하병무씨는 지난 95년 ‘남자의 향기’(전3권)를 펴내 150만부를 팔았다. 97년 ‘들국화’(전2권)는 50만권을 넘겼고, 지난 6월말 나온 ‘눈물’은 1주일만에 재판을 찍었다. 초판이 2만부였다. IMF 이후 40% 가량 규모가 줄어든 것으로 평가되는 작금의 출판 현실에서는 일반적으로 3000부를 찍는 초판을 소화하기에도 벅찬 게 우리네 책의 운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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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록빛 모자의 천사’(전3권) ‘바다 위의 피아노’(전2권)의 이정규, ‘뼁기통’의 이진수, ‘그녀가 눈뜰 때’(전3권)의 조창인, ‘잃어버린 너’의 김윤희, ‘야인’(전2권) ‘초인’(전5권)의 홍재규, ‘밤의 대통령’(전12권) ‘황제의 꿈’(전9권)의 이원호 등이 출판계에서 공인된 ‘보증 수표’ 작가들이다.

이중 ‘뼁끼통’ ‘잃어버린 너’ ‘야인’ ‘밤의 대통령’ 등은 모두 200만부 이상 팔려나간 소설들이다. 세금 등의 이유로 “판매 부수를 줄였으면 줄였지, 결코 늘려 말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게 출판 관계자들의 귀띔이므로 웬만한 기세가 아니다. 출판사 은행나무의 주연선(37) 사장은 “책에 대해 기사 한 꼭지, 평론 한 줄 없어도 권당 최소한 2만부씩은 어김없이 나간다”고 말하고 있다.

그 비결은 무엇일까. 우선 줄거리의 흡인력을 들 수 있을 것이다. ‘하얀 기억 속의 너’(전3권) ‘하얀 사랑’ 등의 작가 김상옥(53)씨는 주로 남녀간의 애절한 사랑얘기를 다뤄온 경우. ‘하얀 사랑’은 제목에서 풍기는 소녀 취향적 분위기와는 달리 한 여인이 광주민주화운동 때 실명까지 한 옛 고교 은사와 중년의 나이에 극적으로 해후하게 되기까지의 절절한 사랑 이야기다. 김씨의 작품을 읽고 감명받은 어느 독자가 보내온 사연을 토대로 한 실화 소설이다.

김씨가 올 7월 발표한 ‘하얀 소망’(전2권) 또한 고려대 상대를 중퇴하고 7년간 원양어선 선원생활을 했던 작가 본인의 경험을 바탕으로 했다. ‘소설보다 더 소설같은’ 현실을 발빠른 문장에 담아 순식간에 읽히는 글들이다. 김씨는 “작품성이다 뭐다 하며 깊이를 따지기 이전에 체험했던 것, 살아온 내용 등을 사실대로 소설화했기에 일반 독자들이 자기 일처럼 느끼는 것 같다”고 말했다. 김씨는 지금까지 1000여 통의 독자 편지(엽서 제외)를 받았다고 밝히기도 했다.

이들 ‘묻혀진’ 베스트셀러의 또다른 특징은 다루는 소재에 대한 철저한 자료 조사이다. 기업 이야기든 범죄조직 이야기든 전쟁 이야기든 이들은 전문가 뺨치는 수준의 지식과 정보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 ‘데프콘’(전8권) ‘동해’(전2권) 등으로 한반도 전쟁 문제를 건드려온 연세대 신문방송학과 출신의 김경진(35)씨는 해상전 특수전 공중전 등 각 분야별 군사 전문가 4명과 함께 작업을 하고 있다. 지난 서해교전 때 소설의 상황과 엇비슷하다 하여 화제가 되었던 ‘남북’(전3권)도 이러한 집단 창작의 결과물이다.

▲ 한·일간의 전쟁을 다룬 소설 '데프콘'을 쓴 군사문제 매니아들. 사진 왼쪽부터 윤민혁, 김경진, 진병관씨
사실 대중소설 시장이 본격소설을 훨씬 압도하고 있는 미국의 경우, 이런 전문성 없이 대중 작가로서 살아남는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마이클 크라이튼(‘주라기 공원’ ‘폭로’), 스티븐 킹(‘미저리’ ‘쇼생크 탈출’), 존 그리샴(‘펠리칸 브리프’ ‘의뢰인’), 톰 클랜시(‘붉은 10월’) 등은 각각 의학·과학분야, 공포물, 법정 소설, 군사·무기분야 등에서 ‘달인’ 대접을 받고 있다는 상황을 고려해 볼 만하다. 토머스 해리스가 ‘양들의 침묵’ 이후 11년만에 내놓은 ‘한니발’ 집필을 위해 프랑스의 최고 요리학원에 3년 동안 다녔다는 출판사측 광고가 빈 말이나 과장이 아니라는 것을 한국의 대중 작가들도 알고 있을 것이다.

우리 대중소설이 미국처럼 대학 국문과에서 언급될 정도가 되기 위해서는 넘어야 할 산이 많은 것이 사실이다. 또 이들 작품의 이른바 ‘문학성’이 떨어진다는 것을 부인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러나 단지 문단의 공식 등단 절차를 거치지 않은 자가 쓴 ‘뻔한 스토리’라는 편견을 갖고 함부로 ‘3류 소설’로 취급하고 있지는 않은지 한번 되짚어보아야 할 시점이다. 들녘 출판사의 박성규(38) 편집국장은 “특히 IMF 이후 사회전반의 경기회복 분위기 속에서도 전혀 회생의 기미를 보이고 있지 않은 출판계 현실 속에서, 등돌린 독자들을 서점으로 다시 불러 들이기 위해서도 이들 대중 작가들에 대한 평가가 제대로 이뤄져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한국출판마케팅연구소 한기호 소장도, “이미 대중문학의 생산은 본격문학의 몇배에 해당하며 시장에서의 반응 또한 본격문학이 감히 엄두를 못낼만큼 공세적인데 이러한 추세는 앞으로 더욱 강화될 것이다. 이제 본격문학과 대중문학의 분류 자체가 아무 의미가 없을 정도가 된 이상 평자들은 대중문학에도 본격적인 관심을 기울일 필요가 있다”고 지적하고 있다.

문학 제도권의 고정관념과 닫힌 시각의 전향을 기대하며, 한 대중 소설가가 최근 작가 후기에 적은 글을 옮겨본다.

문학이 많이 공부한 자나 많이 고민하는 자의 전유물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 말하고 쓰는 행위는 누구라도 할 수 있는 일이고, 누구라도 접하고 즐길 수 있는 것이며, 그래서 영화나 TV 드라마처럼 얼마든지 재미있게 만들 수 있고, 얼마든지 그 누구와도 주고받을 수 있는 것이다.

(기자 : qq@chosun.com)